그리스 국민투표 후 협상 재개 가능성 열어둬
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큰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이 결렬되면서다.위기가 파국으로 이어지면 그리스는 채무 불이행(디폴트)과 유로존 이탈(그렉시트)로 기울고 유럽 통합 심화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결속은 모두 약화한다. 이는 메르켈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고심이 깊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많은 관측통은 애초 그리스와 채권단이 갈등의 정점을 찍고나서 지난 26일(현지시간) 전후의 유로존 정상회의를 통해 사태를 봉합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양측이 시간을 벌면서 리스크를 관리하는 대타협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협상안을 두고 그리스 정부는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판단을 유예하고 국민투표로 민의를 직접 확인하는 수순으로 내달렸고, 채권단은 이를 그리스의 수용 거부로 해석하며 등을 돌렸다.
이에 맞물려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리스의 마지막 자금줄인 긴급유동성지원(ELA) 한도를 동결하고, 그리스 정부는 은행 휴업 등 자본통제와 증시 휴장으로 충격을 관리하면서 내달 5일 국민투표 시행에 대비하고 나섰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29일 독일 대중지 빌트를 통해 메르켈 총리가 위기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그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이자 유럽연합(EU)과 유로존의 최대 경제국인 독일이 움직여야만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미 시간표는 내달 5일의 국민투표를 기점으로 재편성되는 형국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기자들에게 국민투표 이전 유럽 정상회의나 그리스와의 양자 정상회담에 부정적 견해를 밝히고 국민투표 이후 협상 재개 가능성을 언급했다.
관건으로 떠오른 이 국민투표가 채권단 협상안 찬성으로 나오면 그리스와 채권단은 다시 타협 모드로 돌아서겠지만 반대로 나온다면 디폴트와 그렉시트가 현실로 나타나 극심한 혼돈이 이어질 수 있다.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 정부가 지난 2월 과거 나치에 의한 그리스 피해 배상을 거론할 때부터 협상 진통을 예감했다.
배상 요구는 앞서 메르켈 정부가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감내할 것이라는 독일 언론의 보도가 나온 데 대한 반격으로까지 해석된 그리스의 협상 지렛대였다.
그리스의 이런 태도에 메르켈 총리는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과 함께 그리스의 개혁과제 이행을 요구하며 강경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구제금융 대가로 약속한 과제를 이행하지 않으면 더는 지원할 수 없다는 자세였다.
최근 들어선 ‘시간이 없다’라거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전례없는 도움을 받은 그리스가 이제는 연대를 보여줘야 한다’라는 말로 그리스의 결단을 압박했다.
그러나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바란다는 대전제는 메르켈이 그리스 이슈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언술이었다. 이는 유로존 원심력 억제와 EU의 통합 심화로 요약되는 ‘메르켈의 길’이 향하는 목적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됐다.
메르켈은 이날도 자신이 속한 기독민주당 창당 70돌 기념대회에서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며 그런 의지를 재확인했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부터 내리 3기 집권을 이어가는 동안 그리스 구제금융 결정 과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부터도 비판 세력들은 ‘큰 그림’ 없이 ‘퍼주기’만 하고 근본적인 해결로는 나아가지 못한다고 그를 공격했다.
이같은 견해는 독일이 유로화 사용과 유럽 통합시장에서 가장 큰 과실을 따 먹는 국가이므로 부담을 더 안아야 한다는 시각과 대척점에 있다.
예컨대 ifo 경제연구소의 한스-베르너 진 소장은 구제금융이 그리스의 경쟁력 배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며, 3년가량 그리스가 유로 대신 과거 화폐인 드라크마 체제로 경제를 운용하고 나서 유로존으로 돌아올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구제금융 협상을 주도한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그리스에 너무 많이 양보해선 안 된다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메르켈 총리와 갈등을 빚는다는 관측이 끊이지 않았다.
시중 여론마저 그리스인들이 독일인들의 호주머니를 턴다는 쪽으로 쏠리며 그렉시트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 흐름까지 형성됐다.
최근 독일 제2공영 ZDF의 독일인 상대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 51%가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희망했다. 지난 1월에 견주어 20%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제1공영 ARD 조사에선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응답 비율이 22% 밖에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메르켈 총리는 이날 그리스 위기 대응에 관한 정치권의 의사 결집에 나서며 ‘국민투표 이후 협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표변하는 여론과 정치권의 태도이다. 그리스 상황은 국민투표 찬반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한 대응 과제로 남을 공산이 크고, 그 위기가 증폭될수록 메르켈 총리가 안아야 할 정치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재 독일 대연정 다수당인 기독민주당(CDU)과 기독사회당(CSU)연합 및 소수당 파트너인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의 원내 세력은 전체 631명 중 504명이지만 그리스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적지 않은 이견이 있다고 정치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일례로 컨설팅업체 테네오 인텔리전스의 분석가인 카르슈텐 니켈은 최근 그리스와 채권단의 합의안에 관한 의회 승인을 전망하면서 CDU와 CSU 등 보수정당 의원 중 100명이 승인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마르셀 프라처 독일 DIW 연구소 소장은 “메르켈에게 문제는 의회 내 다수를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당에서 압도적 다수를 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해 독일 정치권의 통일된 의사 결집이 메르켈 총리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