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등 전국 집회에 시민들 대거 참여
‘범야옹연대’, ‘얼죽아 연합회’ 등 가상 단체 자처
재기발랄 깃발 화제…‘전국민 집회’ 물결 예고
7일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정상영업 합니다’ 깃발. 철거 중인 건물에 ‘정상 영업’을 알리는 식당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밈(meme)을 패러디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나라가 평안해야 냥이(고양이)도 행복하다.” (범야옹연대)
“복학 전에 탄핵하라.” (전국 휴학생 연합회)
“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달라.”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얼죽아 협회 서울지부’, ‘걷는 버섯 동호회’, ‘걸을때 휴대폰 안 보기 운동본부’…서울 여의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린 집회에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쏟아졌다. “눈사람을 안아주세요”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등 집회와의 연관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깃발들이 거리를 뒤덮었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등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린 전국 주요 지역에는 그야말로 ‘천하제일 깃발대회’, ‘아무말 깃발 대잔치’가 열렸다.
시민들은 자신의 관심사나 취미, 좋아하는 반려동물 등을 새긴 기상천외한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깃발을 만들지 못한 시민들은 ‘전국 깃발 준비 못한 사람 동호회’를 만들어 소심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특정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등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민적인 집회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 ‘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달라’, ‘내향인’,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등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엄중한 시국에 휘말린 피곤한 현대인들을 표현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시민들은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등을 결성해 거리로 나섰다. 내향적인 성격의 한 시민은 자신이 내향인임을 괄호 안에 적으며 소심한 성격을 드러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 엄중한 시국에 피로감을 호소하며 “왜 나를 거리로 나서게 만드냐”고 탄식하는 듯한 메시지다.
혼란스러운 시국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선택장애’에 비유한 깃발도 눈에 띄었다. 한 시민은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연합회’를 결성하고 “아무거나 규탄한다, 뭐가 됐던 반대한다, 이것저것 보장하라”고 외쳤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등장했다.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다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함께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면서 윤 대통령의 탄핵을 미루지 말 것을 촉구했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등장한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깃발.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면서 윤 대통령의 탄핵을 미루지 말 것을 촉구했다. 자료 : 엑스(X)
혼란스러운 시국과 거리를 두고 싶은 동물 애호가들도 거리로 나섰다. 반려견을 키우는 시민들은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똥강아지 산책연합’, 고양이 집사들은 ‘과체중 고양이 연합’ ‘전국고양이집사노동조합(참야옹)’ 등을 결성해 집회에 참석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자이언트 판다로 지난 4월 중국에 반환된 푸바오의 팬들은 푸바오의 사진을 담은 ‘푸바오의 행복을 바라는 모임’ 깃발을 들었다. ‘전국쿼카보호협회’도 둥글둥글한 쿼카의 얼굴을 그려넣은 깃발을 만들어 시선을 끌었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푸바오의 행복을 바라는 모임’, ‘전국쿼카보호협회’, ‘눈사람 안아주기 운동본부’ 등 엄중한 시국과 거리를 둔 채 동물 등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피켓. 나라와 고양이의 평안을 바라는 집사의 마음이 담겼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얼죽아’, ‘삼각김밥 미식가’, ‘민초단’, ‘오이 사절’ 등 시위를 틈타 자신들의 미식 취향을 드러내는 시민들도 있었다. 서울 여의도 집회에는 ‘계란은 완숙’이라는 깃발이 등장했는데, 이 깃발을 향해 한 시민이 “계란은 반숙이지”라고 외쳐서 웃음보가 터졌다는 이야기도 엑스(X)에서 전해진다.
엄중한 시국에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등장했다. ‘전국 거북목 협회’, ‘전국 혈당 스파이크 방지 협회’, ‘전국 수족냉증 연합’ 등이 집회에 참석했으며 한 시민은 ‘제로 칼로리’ 열풍을 틈타 ‘제로칼로리 스팸’ 출시를 요구하는 ‘제로칼로리 스팸 추진협회’를 결성했다.
국회 앞 집회에 참석한 한 시민은 엑스(X)에 “‘테니스 엘보(팔꿈치 관절 주위 통증) 환자 연합’ 깃발도 있었다”면서 “이 깃발을 든 시민은 테니스 엘보 환자 치고는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라고 전했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엄중한 시국과 거리를 둔 채 ‘계란은 완숙’, ‘얼죽아’, 삼각김밥 등 자신의 미식 취향을 드러내는가 하면 “먹을까 말까 고민되면 먹기”를 외치는 깃발도 눈에 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엑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엄중한 시국 속에서도 거북목과 수족냉증, 혈당 스파이크 등 자신의 질환을 우려하는 시민들과 함께 ‘제로 칼로리 스팸’을 출시해달라는 시민도 등장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엑스
이날 집회에서는 특히 K팝 아이돌과 애니메이션, 게임 등 특정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는 ‘덕후(오타쿠를 변형한 신조어)’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티켓 예매 플랫폼에서 콘서트 등 티켓 예매를 하다 실패했을 때 뜨는 문구) 메시지에 실망한 K팝 아이돌 팬들은 물론, 버추얼 싱어와 웹소설, 애니메이션 등을 좋아하는 팬들도 자신의 취향을 깃발에 한껏 드러냈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팬임을 자처한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불꽃남자 정대만”, “서태웅 친위대 전국 연합”, “농놀(농구놀이) 연합회 산왕(슬램덩크에 등장하는 가상의 고교) 지부” 등의 깃발도 거리에서 포착됐다.
엑스(X)에서는 ‘전국 응원봉 연대’가 결성돼 공식 계정이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3D(K팝 아이돌 등 현실 속 연예인)은 물론 2D(애니메이션 등), 버추얼(가상) 등 모든 응원도구를 환영한다”면서 “덕후에게 덕질만 걱정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버추얼 싱어, 웹소설, K팝 아이돌 등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제발 ‘덕질’(아이돌, 애니메이션 등을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서태웅 친위대’, ‘농놀(농구놀이) 연합회 산왕지부’ 등 만화 ‘슬램덩크’의 팬으로 추정된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이같은 ‘아무 깃발 대잔치’는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처음 시작됐다. 민주노총 등 각종 단체와 무관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서면서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이름을 패러디한 깃발을 만들어 들어올린 게 발단이 됐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패러디한 ‘전견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패러디한 ‘전국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민주노총을 흉내낸 ‘민주묘(猫)총’, ‘만두노총 새우만두노조’ 등이 화제를 모으며 거리에는 재치있고 개성 넘치는 깃발들이 나부꼈다.
8년 만에 ‘천하제일 깃발대회’가 열리자 2016년 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도 당시 만들었던 깃발을 꺼내들어 거리로 나섰다. 2016년 결성된 전국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화실련)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깃발 만들기에 적합한 원단과 깃대, 이를 활용해 손쉽게 깃발을 만드는 법과 집회 현장에서 안전하게 깃발을 흔드는 방법 등을 공유하고 있다.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대학생들의 재치있는 깃발들. 전국 휴학생 연합회가 “복학 전에 탄핵하라”고 촉구하는가 하면 한 대학생은 “다음주가 시험”인데도 거리로 나섰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 참석한 시민들. “게임도 못 하겠다”, “마감하기도 급하다”는 피켓을 들고 집회 현장에 나와 노트북으로 게임과 웹소설 마감을 하고 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7일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집회 현장에서 발견된 재치있는 깃발들 중 하나로, 한 시민이 배우 정우성이 JTBC 드라마 ‘빠담빠담’에서 했던 대사 “사과해요 나한테”를 외치고 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시민이 ‘전국 깃발 준비 못한 사람 동호회’라는 깃발을 들고 있다.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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