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마음이 놓이는 소리/황수정 논설위원

[길섶에서] 마음이 놓이는 소리/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9-06-09 22:44
수정 2019-06-10 01:5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어쩌다 얻어 키우는 난초 한 포기가 책상 귀퉁이에서 근 삼년째 살고 있다. 어설피 곁에 놓은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즐거움이 별스럽다. 마른 화분이 물 먹는 소리는 귓바퀴를 감아 마음 안쪽 깊숙이 잔무늬들을 파놓는다.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처럼 흐뭇했다가, 갈라진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처럼 배가 불렀다가.

화분의 흙이 물에 젖을 때의 그 냄새에도 상념은 스무고개를 넘는다. 빗금을 그어 마당을 두들기면 사방에 흙내를 뿜어 올리던 여름날의 소나기, 소나기 소리 같은 대밭의 바람, 쏴쏴 흔들리는 댓잎 같던 누에들의 뽕잎 갉는 소리. 아 모르겠다, 누에들의 합창은 내 귀로 정말 들었던 것인지 꿈속의 환청인지는.

화분 흙이 물을 먹는 낮은 소리가 말 못하게 좋아서 나는 새벽에 깨어 있다. 발소리 숨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는 고요를 기다리면서.

아이들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길을 걷고 있다. 제 발자국 소리를 제 귀로 듣지 못한다. 바람 속에 잠겨만 있어도 마음이 놓이는 소리들은 들리는데. 우물만큼 깊은 이야기가 쏟아지는데.

들을 줄 모르는 저 귓바퀴들, 칠엽수 너른 이파리 사이를 혼자 물처럼 흐르는 아까운 이 바람 소리.

sjh@seoul.co.kr
2019-06-10 2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정치적 이슈에 대한 연예인들의 목소리
가수 아이유, 소녀시대 유리, 장범준 등 유명 연예인들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대한 지지 행동이 드러나면서 반응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연예인이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직접적인 목소리는 내는 것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연예인도 국민이다. 그래서 이는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연예인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