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삼척, 울진을 비롯하여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영해, 평해와 같은 고을은 예부터 땅이 매우 척박하고 자갈이 많아 농사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 고을에서는 고기를 잡고, 미역 따거나 소금 굽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땅은 비록 메말랐어도 부유한 자가 많다고 하지만, 서쪽으로 고개가 너무 높아서 이역과도 같아 한때 유람하기는 좋겠으나 오래 살 곳은 못 되었다.
소금 전매하는 일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오랜 세월 그대로 고치지 못하네
우리나라 법이 크게 엄하여, 해마다 내는 세금 일 년 농사보다 많다네
나도 관동으로 나온 뒤에 해안을 다니며 몸소 독려했다네
백성들 누추한 거처는 오두막집, 쑥 엮어 만든 문에 자리조차 걸 수 없어
늙은이가 자식 손자 데리고, 한 치의 시간도 쉴 수가 없네
혹한에도 바닷물 길어 오기에, 짐 무거워 어깻등이 휠 대로 휘고
열기와 연기 그을음, 끓이는 훈기에 눈썹마저 타버렸네
문 앞의 열 수레나 되는 나무도, 하룻저녁 땔감이 되지 못하네
하루종일 백 말의 물을 끓여도 소금 한 섬 채울 수 없네
만약 기한 내에 대지 못하면 혹독한 관리는 꾸짖고 성내어
운송하는 관리는 소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전매하여 비단으로 바꾸지
임금은 공신을 중하게 여겨 상을 주는 데 아끼지 않네
한 사람 몸에 입은 옷가지, 만백성 괴로움 깊이 쌓이네
슬프다 저 소금 굽는 사람들이여, 옷은 해어져 등조차 가릴 수 없고
이 괴로움 견디지 못하여 급히 도망하여 자취를 감추네
고려시대 안축이 소금 굽는 일을 보고 충격받아 이렇게 묘사할만치 염한들이 겪는 고초를, 그는 몸소 눈으로 보고 있었다.
평생 염막만을 지키고 앉은 터에 이제 막 육십 줄에 들어섰건만, 구루병 걸린 당나귀처럼 허우대가 찌그러진 행색은 애꾸눈이 보아도 열 살은 더 먹어 보였다. 남들이 그의 인색함을 허물하면 언제나 그는 부자로 살았던 어떤 역관의 얘기를 사례로 들었다.
그 역관은 일찍이 부자 소리를 들었으나 의복은 매우 검소하였다. 찢어진 모자에 칼은 나무로 만들어 썼다. 그러한 연고를 물었더니 역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물건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면, 힘있는 관리와 선비들이 너도나도 모두 가지고 싶어 침을 삼키게 될 것이다. 그때 선뜻 건네주지 않으면 환심을 잃게 될 것이고 골고루 나누어주자면, 숫자가 모자랄 것이다. 이어서 송석호는 내가 외관이 의젓하고 치장이 화려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필경 화를 부르게 될 것이므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2013-04-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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