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흰’ 안에 담겨 있죠” 스웨덴 독자들, 한강에 빠져들다

“삶과 죽음이 ‘흰’ 안에 담겨 있죠” 스웨덴 독자들, 한강에 빠져들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19-09-29 22:50
수정 2019-09-30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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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예테보리국제도서전

28일(현지시간) 스웨덴 예테보리국제도서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강(가운데) 작가가 자신의 소설 ‘흰’의 한 구절을 낭독하고 있다.  예테보리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8일(현지시간) 스웨덴 예테보리국제도서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강(가운데) 작가가 자신의 소설 ‘흰’의 한 구절을 낭독하고 있다.
예테보리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한국어에는 흰색을 말하는 두 개의 형용사, ‘흰’과 ‘하얀’이 있습니다. ‘흰’ 안에는 슬픔도 있고 삶과 죽음도 있고 소슬한 느낌이 있죠. 예를 들어 우리가 죽은 사람을 기릴 때 입는 옷을 소복이라고 하는데, 그 옷은 ‘하얀 옷’이라기보다는 ‘흰옷’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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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가 올해 번역된 ‘흰’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한 이 세미나를 보기 위해 스웨덴 독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날 도서전 측이 준비한 375석이 꽉 찼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한 작가가 올해 번역된 ‘흰’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한 이 세미나를 보기 위해 스웨덴 독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날 도서전 측이 준비한 375석이 꽉 찼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스웨덴어 ‘vita’는 우리에겐 ‘흰’이자 ‘하얀’이다. 그중 ‘흰’이라는 단어로 소설과 산문시와 에세이를 넘나드는 책을 펴낸 작가의 말에 청중들은 빠져들었다. 27~28일(현지시간) 이틀에 걸쳐 2019 스웨덴 예테보리국제도서전에서 독자들과 만난 한강(49) 작가의 얘기다. 전날은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진은영 시인, 스웨덴 저널리스트·작가와 함께, 이튿날은 단독으로 세미나에 나섰다. 한 작가의 소설은 스웨덴에서만 맨부커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포함해 ‘소년이 온다’, ‘흰’ 등 3권이 번역 출간됐다.

세미나에서는 스웨덴에 가장 최근 나온 ‘흰’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지난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됐던 ‘흰’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의 사연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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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한 작가와 진은영(왼쪽) 시인이 진행한 ‘사회역사적 트라우마’ 세미나도 현지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예테보리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전날 한 작가와 진은영(왼쪽) 시인이 진행한 ‘사회역사적 트라우마’ 세미나도 현지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예테보리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흰’을 쓴 배경을 묻는 질문에 작가는 “2014년 5월 ‘소년이 온다’가 출간될 즈음 ‘하얀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어느 날 오후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 입는 배내옷, 그 위를 감싸는 강보, 눈, 겨울, 달, 엄마의 젖, 소금, 물에 반짝이는 흰빛 같은 근원적인 것들을 지나 죽을 때 입는 수의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입는 상복까지 리스트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흰’을 쓰는 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의 체류 경험도 한몫했다. 그는 “20세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상처를 남긴 시간이었다”며 “한국에서는 전쟁부터 1980년 광주 5월과 2014년 봄에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애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여러 의미를 담아 소설을 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 그는 “‘소년이 온다’가 역사적인 사건을 담고 있지만 굉장히 개인적인 책이고 ‘채식주의자’는 정확히 꿰뚫을 수 없는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인 것”이라고 소개했다.

한 작가가 참석한 세미나는 첫날 120석, 둘째날 375석이 모두 꽉 찼다. 한 작가의 번역본을 모두 읽었다는 문학교사 프리다 퍼네스텐(42)은 “특히 ‘흰’이 가진 시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돼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추천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 한 작가의 사인을 받아 간 중학교 역사교사 세실리아 거트(45)는 “‘흰’과 ‘하얀’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학생들에게 서양의 역사가 아닌 다른 세계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도 한강의 책을 읽겠다”고 말했다.

예테보리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9-09-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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