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상 교장 한상국
서울여상 2011년 2월 졸업생 평균 연봉은 2,198만 원, 대졸 평균 초임 2,123만 원을 능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제1금융권 신입사원 학력기준이 없어지면서 18년 만에 은행(기업은행)에 진출했다. 최근 5년간 취업률은 99.6%에 이르며, 2011년 졸업생 진학희망자 대입 합격률은 90.9%에 달한다. 국내 특성화고등학교 취업률 부동의 1위를 자랑하는 서울여상의 비결은 철저한 실무 중심의 현장교육. 현재 시중은행 여성 지점장 300명 중 108명(36%)이 서울여상 출신일 정도로 ‘여성금융사관학교’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서울여상을 찾아가 한상국 교장을 만났다.
1970년대 서울여상은 최고의 명문 여상이었다. 당시 여성들의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을 때 똑똑한 여학생들은 대부분 서울여상으로 모였다. 그러다가 여성들의 대학 진학이 활발해지면서 서울여상은 잊혀지는 듯했다. 많은 실업계 고등학교가 교명을 바꾸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서울여상도 마찬가지였다. 교명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상국 교장은 기존 교명을 고수했다. ‘서울여상’의 브랜드 가치가 크다고 믿었고 선조가 세운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홍제동 교사에서 관악산 밑 현재의 교사로 옮기면서 실습실을 대폭 늘렸고 특성화고교로 새로이 자리매김함으로써 내실을 기했다. 선취업 후진학의 길도 열었다. 학부모 학생들이 관심을 기울였고 언론에서 앞다투어 서울여상을 소개했다. 과거의 명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민족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자 상업학교
서울여상은 서울대 가는 언덕길의 청룡동(과거 봉천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학 중이었지만 정갈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잠시 70년대 교복의 추억이 살아나는 듯했다.
한상국 교장은 1974년부터 지금까지 37년간 서울여상의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년이 지났다고 해서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와의 특별한 인연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면직된 한규설 참정대신의 증손입니다. 증조부께서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 찾는 길은 교육에 있다 하시면서 여성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가 경성여자상업학교(서울여상의 전신, 이하 서울여상으로 호칭)입니다. 일제의 방해로 증조부께서 직접 나서진 못하고 설립자는 할아버지(한양호)로 되어 있지요.”
서울여상은 민족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자 상업학교다. 여성교육, 특히 어머니들의 수리교육을 통해 가정의 살림을 알뜰히 하고, 그럼으로써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설립자의 정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서울여상에는 운동부가 많았다. 탁구부 농구부 연식정구부 등의 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극일을 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탁구나 정구대회에서 일본을 이기고 돌아온 날엔 전교생이 설립자의 집(계동 146번지 한옥)에 모여 축하잔치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 탁구의 여왕이자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이에리사도 이곳 서울여상 출신이다.
주산 암산 분야에서도 서울여상은 괄목할 성적을 거두었다. 1970~80년대 주산 암산 세계대회가 열리면 일본·대만이 서울여상 선수들을 이기지 못했다. 암산왕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이춘덕 씨도 서울여상 출신, 지금은 모교의 교사로 재직중이다. 2007년에는 서울여상 졸업생 김미선 양이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주최한 MS오피스 세계경진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엑셀 분야 세계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인사 받느라 은행 앞을 못 지나가
한상국 교장이 미국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유학에서 돌아온 것은 60년대 말,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변영태 씨가 같이 일해보자고 했지만 학교 사정이 안팎으로 힘들었다. 증조부가 세운 학교를 이렇게 쇠퇴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고교 교사 될 길이 없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영어교사 자격시험을 봐서 교사가 되었다. 처음엔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교장 수업을 쌓았다. 그러다가 1974년에 서울여상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30대 젊은 교장으로서 인기가 좋았다.
“당시에는 5대 시중은행에 졸업생이 한 은행에 100명씩 들어갈 때였어요. 퇴근시간 무렵 미도파 앞을 지나가면 졸업생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느라 걸어가지를 못할 정도였지요. 지금은 밖에서는 별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은행 안으로 들어가면 지점장 급이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한상국 교장은 또한 대한탁구협회 국제담당 부회장으로 20여 년 활동을 했다. 세계탁구연맹 부회장으로 5년 활동했으며 현재는 세계탁구연맹 재무감사위원회 위원장과 대한탁구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1970년대 한국 탁구는 실력은 있었지만 국제무대에서 외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이 주도한 아세아연맹에서 떨어져 있었고 국제심판도 없었다.
그러던 차 한상국 교장이 국제담당 부회장을 맡으면서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 결과 1980년 서울오픈탁구대회를 개최하면서 탁구 붐을 일으켰다.
“탁구를 통해서 제3세계,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일조를 했지요. 내가 탁구협회 일을 하게 된 것도 그 뿌리는 학교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유학 시절 전공한 외교학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변했다. 한상국 교장이 교육개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5년제 학제를 도입하자고 건의했지만 전문대학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홍제동 교사가 좁고 발전할 수가 없겠다 싶어서 옮기기로 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네가 봉천동이었다. 그래서 1991년 지금의 교사로 이전을 했다. 지금은 동명이 청룡동으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은 5년제 폴리텍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기 때문에 실습동이 한 건물을 차지한다. 나머지 한쪽이 교실동.
특성화고교로 지정되면서 특강도 많이 하고 고급자격증을 많이 딸 수 있도록 교과내용을 알차게 바꿔나갔다. 국제무역사, 투자상담사, 테일러 자격증 시험에서 서울여상 학생들이 최연소 합격자 연령을 자꾸 내려가도록 했다.
“신입생들이 처음에는 대부분 대학진학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일년 동안 진로 방향에 대한 특강을 실시하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비율이 바뀌지요. 선취업 후진학 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졸업할 때는 70%가 취업, 30%가 진학을 합니다.

학교기업 마이트라, 연 4억 매출
서울여상에는 성공한 선배들이 많다. 은행의 지점장, 펀드메니저, 디자이너, 교수 등 다양한 분야의 성공한 선배들이 매달 찾아와 진로를 고민하는 재학생들에게 가슴에 와닿는 얘기를 해준다고 한다. 즉 아이들한테 꿈의 지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생님들의 열성도 무시할 수 없다. 퇴근시간 후에도 상담과 지도에 여념이 없다. 또 서울여상의 교칙은 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하다가도 졸업한 선배들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준다. 사회에 나갔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 기준이 인성교육이라면서 후배들을 다독여주기도 한다.
“저희는 매년 졸업생들이 취업하고 있는 회사의 인사담당자를 초대합니다. 학교교육에서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또 회사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러면 서울여상 출신들은 반할 정도로 인사성 바르고 일도 잘한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들을 때면 보람을 느끼지요.”
또한 서울여상에는 실제 무역회사가 있어 학생들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다. 회사의 이름은 마이트라. 작년 한 해 매출 실적은 4억, 일본 수출도 한다. 주요품목은 졸업가운, 18명의 학생이 직접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유통, 마케팅, 회계업무를 본다. 웬만한 중소기업 부럽지 않은 셈. 여기서 얻은 수익은 학교기업 사업자금으로 재투자되고 장학금으로도 사용된다.
“교감 선생님을 CEO로 하고 담당 선생님, 담당 직원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방과 후에 디자인, 회계, 전표정리, 마케팅 업무를 합니다. 교내에 가게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학교에서 백만 원 정도 지원해서 창업도 해보게 합니다. 이 쇼핑몰을 만들어서 물건을 매입하고 상품 광고 사진도 찍어서 홍보하는 등 직접 판매해 이윤을 남기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랴 회사 운영하랴 힘은 들지만 이 일을 아주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딸이 있으면 서울여상에 보내고 싶을 정도라고 했더니, 서울여상 교사 따님들이 몇 명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꿈을 물어봤다.
“처음과 같습니다. 우리 학교 출신들이 국가 발전의 동량이 되는 것, 아이들이 꿈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한상국 교장은 자식이 이 자리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지금 그의 두 아들은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_ 김창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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